
아카데미 시상식의 ‘각본상’ 부문은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설계도라 할 수 있는 시나리오의 완성도와 창의성을 평가하는 매우 중요한 상입니다. 연출, 연기, 촬영 등이 후반 작업이라면, 각본은 그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특히 최근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들을 살펴보면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서, 구조적 완성도(서사), 인물의 감정과 주제를 녹여낸 대사, 새롭고 탄탄한 구성 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최근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들을 중심으로 서사, 대사, 구성의 관점에서 집중 조명해 봅니다.
1. 서사 – 시간, 감정, 시점을 설계하는 예술
영화의 서사란 단순히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들의 공통점은 시청자에게 새로운 내러티브 경험을 제공했다는 점입니다. 반복적 구조, 역순 서사, 플래시백, 다중 시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주제에 맞는 서사를 짜내고 있습니다.
① 어 파더 (The Father, 2020)
이 작품은 치매 환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구성한 혁신적인 서사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관객은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겪는 혼란 그 자체를 ‘체험’합니다. 동일한 장면이 반복되고, 인물의 얼굴이 바뀌고, 시간과 공간이 뒤섞이면서 서사 구조가 흔들리는데, 이는 곧 주인공의 인지 혼란과 직결됩니다. 주관적 리얼리즘 서사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② 기생충 (Parasite, 2019)
봉준호와 한진원이 공동 집필한 기생충의 서사는 3막 구조를 따르면서도 ‘장르적 반전’을 적극 활용합니다. 처음엔 코미디 같지만 중반부터 스릴러, 후반엔 비극으로 장르가 변하며 내러티브가 전개됩니다. 특히 집 안에 숨어 있는 비밀, 계단과 반지하 구조는 단순한 플롯 장치가 아니라 영화 전체의 상징적 서사를 구성합니다. 영화의 흐름은 매끄럽지만, 그 안에는 복선과 반전이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③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chester by the Sea, 2016)
이 영화는 주인공의 현재와 과거를 교차 편집으로 보여주며 감정의 축적을 이끌어냅니다. 한 순간의 큰 사건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데 남겨진 상처의 지속성을 중심으로 한 서사로, 감정의 흐름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구조입니다. 이런 방식은 관객에게 서사의 구조를 이해시키기보다 감정을 공유하게 만듭니다.
2. 대사 – 감정과 주제를 담는 언어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의 대사는 캐릭터의 개성뿐 아니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명확히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말의 양보다 질, 전달하는 의미, 감정의 뉘앙스를 어떻게 살려내느냐가 중요합니다.
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2)
멀티버스 속에서 수많은 현실이 등장하지만, 그 속을 지탱하는 대사는 철저히 감정 중심입니다. “그냥 이 세탁소에서 너와 함께 세금 보고만 하고 살고 싶었어”라는 대사는 수십 개의 자아가 교차하는 혼란 속에서 인물이 가진 감정의 본질을 꿰뚫습니다. 복잡한 설정을 정서로 정리해 주는 힘 있는 대사입니다.
② 더 페이버릿 (The Favourite, 2018)
이 작품의 대사는 고전적 시대극의 문체를 따르면서도, 날카롭고 유머러스하며 종종 현대적인 감각을 지닙니다. 왕실의 권력관계를 대사로 표현하면서도,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선과 야망을 반영하는 섬세한 언어가 인상적입니다.
③ 코다 (CODA, 2021)
청각장애인 가족 사이에서 유일하게 듣고 말할 수 있는 주인공의 입장은 대사의 쓰임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청각적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말보다는 눈빛과 제스처가 대사의 기능을 대체합니다. 이 작품은 언어 외의 대사, 즉 비언어적 표현을 중심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새로운 각본 구성의 사례입니다.
3. 구성 – 장면 배치와 리듬의 정교함
탄탄한 구성은 영화가 전개되는 리듬을 조절하고, 관객이 몰입하게 만들며,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게 합니다.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들은 구성적 측면에서도 매우 세심한 구조로 완성됩니다.
① 스팟라이트 (Spotlight, 2015)
이 영화는 기자들의 취재 과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대단한 사건이 아닌 반복되는 인터뷰, 문서 확인, 내부 논쟁을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하지만 장면의 배치와 긴장감 있는 리듬 덕분에 다큐멘터리적 사실성 속에서도 극적인 몰입감을 유도합니다.
② 조커 (Joker, 2019) – 각색상 수상
비록 순수 각본상이 아닌 각색상이지만, 조커의 구성은 매우 계산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의 심리 변화가 점진적으로 쌓여가는 구조는 단순히 사건 중심이 아닌, 감정의 축적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장면 간 전환 역시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시각적으로 설계했습니다.
③ 조조 래빗 (Jojo Rabbit, 2019)
2차 세계대전이라는 무거운 역사 속에서 한 소년의 성장기를 다룬 이 작품은, 유머와 슬픔이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구성을 보여줍니다. 특히 후반부의 급격한 전환(유쾌함 → 비극)의 타이밍은 철저히 계산되어 있으며, 리듬의 균형이 뛰어난 각본입니다.
결론 – 각본은 영화의 뼈대이자 감정의 구조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들을 분석해 보면, 단순히 이야기를 잘 쓰는 것이 아니라 감정, 철학, 주제, 인물의 내면까지 정교하게 설계된 각본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서사적 실험, 깊은 감정의 대사, 효과적인 구성은 각본의 3요소로 자리 잡고 있으며, 이들은 곧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핵심입니다.
영화 제작을 준비하는 사람이나 영화 비평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은 단순한 관람 대상이 아니라, 분석하고 모방하며, 더 나아가 새롭게 창작해야 할 창의적 기준입니다. 훌륭한 각본은 이야기를 넘어서, 영화 전체의 미학과 메시지를 담는 그릇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됩니다.